아무도 택시기사들의 분신을 접하며 전태일을 떠올리진 않는다. 전태일의 분신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돌리는 분신이었고 택시기사들의 분신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추려는 분신이다. 이재웅과 택시기사 중에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돌리는 쪽은 오히려 이재웅이다.
전 세계 추세와 비교하면 한국의 모빌리티 혁신의 수레바퀴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 이재웅으로서는 애가 탈 노릇이다. 그래서 비난의 맞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혁신의 수레바퀴를 가장 앞에서 끌고 있다.
지금 해외는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우버 플랫폼의 시가총액이 미국 자동차제조 3사와 맞먹는다. 거품이 있다고 해도 역사는 GM이나 옐로우 택시가 아니라 우버 편이다. 자가용이 없어도 되고 택시기사가 어떤 사람일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다. 누가 자동차를 만들고 운전하느냐가 아니라 배차의 기술, 배차의 플랫폼이 더 중요한 시대다.
그래서 역사는 분신하는 택시기사가 아니라 “분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이재웅 편이다. 이재웅은 마치 미리 가서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연어를 기다리는 곰인 셈이다.
하지만 혁신의 수레바퀴가 질주할 때는 늘 부상자가 생겨난다. 오죽했으면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 제분소를 세워 주변 방앗간을 하루아침에 몰아내자 사람들은 이 제분소를 ‘악마의 방앗간’이라 불렀겠나. 오죽하면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산업혁명으로 영국서민들의 삶이 피폐해지자 ‘악마의 맷돌’이라고 시로 읊었을까.
혁신의 맷돌은 돌아야 하지만 그 맷돌에는 악마적 속성이 있다. 이재웅이 생각하는 것처럼 혁신의 그림자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어떤 사람들에겐 ‘악마’ 급이다. 지금은 그 맷돌과 방앗간이 바로 플랫폼이다.
그래서 이재웅이 “타다가 택시하고 고객층이 분명히 다르지만 타다가 택시 고객을 다 빼앗아서 서비스한다고 가정해도 서울시 택시매출의 2%가 채 안될 텐데”라고 했을 때 그가 혁신의 그림자를 얼마나 과소평가하는지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이재웅이 “혁신에 승자와 패자는 없다. 우리 사회 전체가 승자가 되는 것이고 피해자가 있을 뿐”이라고 했을 때는 그가 혹시 오만에 빠진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잠시 들었다. 혁신의 피해자는 패자다.
거친 표현이 있긴 했지만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혁신으로 뒤처지는 계층을 보호하는 것이 정부로선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라고 했을 때 이재웅이 “이분은 왜 이러느냐” “출마하시려나”고 비아냥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택시기사들의 생업에 대한 존중의 애티튜드를 느낄 수 없었다. 생업의 생(生)은 삶이자 목숨이다.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한때 출근할 때마다 듣는 노래가 있었다. 자이언티의 양화대교. 노래 가사처럼 모두 아프지 않고 행복할 순 없겠지만 사람들은 아픔을 줄이고 싶어 한다. 이들의 바람에 대한 신 권력의 자리에 선 이재웅의 에티튜드가 아프다. 자이언티를 키운 건 아버지의 핸들이었다.
<양화대교>
우리 집에는
매일 나 홀로 있었지
아버지는 택시드라이버
어디냐고 여쭤보면 항상
"양화대교“
아침이면 머리맡에 놓인
별사탕에 라면땅에
새벽마다 퇴근하신 아버지
주머니를 기다리던
어린 날의 나를 기억하네
엄마 아빠 두 누나
나는 막둥이, 귀염둥이
그 날의 나를 기억하네
기억하네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래 그래
그 때는 나 어릴 때는
아무것도 몰랐네
그 다리 위를 건너가는 기분을
어디시냐고 어디냐고
여쭤보면 아버지는 항상
양화대교, 양화대교
이제 나는 서있네 그 다리 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