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충신 정몽주는 1392년 선죽교에서 이방원 일파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다. 조선 건국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한 이방원(이성계의 5째 아들, 뒷날의 조선 3대 임금 태종)의 ‘결단’에 의해 벌어진 일이다.
우리는 이방원이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하여가’라는 시조를 읊었는데 그 자리에서 정몽주는 고려왕에 대한 충성심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단심가’를 지어 응수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방원이 ‘상대의 욕구(interest)’라는 협상의 키워드를 알았더라도 정몽주에 대한 설득방법은 다르지 않았을까?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한 이후 새나라를 건국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을 당시, 이성계의 마음을 가장 힘들게 하는 존재가 바로 포은 정몽주였다. 이성계로서는 그냥 제거하기에는 고려의 민심이 신경 쓰였고, 그대로 두기에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이때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이 나서서 자신이 직접 정몽주를 설득해 보겠다고 한다. 아들 중 가장 총명했던 방원이었기에 이성계는 정몽주에 대한 설득작업을 방원에게 맡겨본다.
당시 정몽주는 50대 중반인 반면, 이방원은 20대 중반이었다. 정몽주는 이미 부와 명예를 누릴 만큼 누린 중신(重臣)이자 대유학자인 반면, 이방원은 혈기왕성한 권력자의 아들이었다. 그만큼 둘은 너무도 다른 배경을 갖고 있었다.
자, 만약 여러분이 이방원의 참모라면 정몽주를 설득하기 위해서 어떤 전략을 써야 한다고 충고했을까? 마구잡이로 해서는 도저히 설득당하지 않을 꼬장꼬장한 노 유학자를 어떻게 설득해야만 할까?
이방원이 정몽주를 설득하기 위한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 시조를 통해 이방원은 ‘우리 같은 편이 되어 오래 오래 부귀영화를 누려봅시다’는 제안을 한 것인데 과연 이런 제안이 충절의 정신으로 똘똘 뭉친 정몽주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적어도 이방원은 정몽주에게 대의명분에 따른 제안을 했어야만 했다. “도탄에 빠져서 고생하고 있는 백성들을 보십시오. 현재 고려 조정의 능력으로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어렵다는 것은 대감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우리 신흥세력이 추구하는 것은 단순한 집권이 아닙니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함입니다. 대감, 제발 대감의 그 지혜를 어려운 백성들을 위해 저희들이 쓸 수 있도록 도와주시오.”
하지만 이방원의 제안에는 그 어떤 대의명분도 찾아볼 수 없었다. 풍류를 즐기며 부귀영화를 누리자는 식의 이 제안에 종1품 문하시중을 지낸 인물이 동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권력이나 재물도 이미 누릴 만큼 누린 사람에게 시정잡배 다루듯이 접근했으니 어찌 설득이 되겠는가.
한비자는 <세난편>에 이렇게 적었다.
"명예를 중시 여기는 사람에게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설득하면 실패한다. 왜냐하면 스스로 비천하고 비루한 사람으로 여기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유명한 정몽주의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는 이 시조를 읊으며 아마도 이미 죽음을 예감했으리라. 아마도 이방원은 정몽주의 단심가를 접하고 ‘도저히 말귀가 안 통하는군. 제거밖에는 길이 없다’라고 생각했을 수 있으나 이는 정몽주의 욕구(interest)를 전혀 감안하지 못한 지극히 일방적인 입장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참살한 일은 이성계나 정도전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왔고 결국 이성계와 정도전이 잔인한 성격의 방원을 제치고 막내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두 차례 왕자의 난이라는 골육상쟁의 비극을 초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