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아, 내가 언제 그런 약속을 했다고 그래?”
몇 가지 조건만 해결되면 마치 계약을 체결해 줄 것처럼 운을 띄운 甲. 그래서 乙은 어떻게든 甲이 내건 조건을 맞추려고 고심했는데 甲은 일방적으로 계약협상을 파기했다. 열 받은 乙이 甲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유형의 사건들이 많다. 구체적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행동이나 여러 가지 정황에 비추어봤을 때 ‘당연히 그럴 것이리라’라는 믿음을 갖게 되는데 나중에 그 믿음이 뒤집어 질 경우 상대방은 황당해 하거나 나아가 분노를 느끼는 경우들이다.
계찰괘검(季札掛劍)
오(吳)나라 왕 수몽(壽夢)의 아들인 계찰(季札)의 일화이다. 계찰은 처음 사신으로 떠났을 때 오나라의 북쪽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서(徐)나라의 군주를 알현하게 되었다. 서나라의 군주는 계찰의 보검(寶劍)이 마음에 들었으나 감히 입 밖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계찰은 속으로 그의 뜻을 알아차렸지만 사신의 자격으로 중원(中原)의 각 나라를 돌아다녀야 하였기 때문에 노정이 험한 관계로 검을 그에게 주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서나라에 도착해보니 서나라의 군주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이에 계찰은 자신의 보검을 풀어 무덤가의 나무에 걸어놓고 떠났다. 수행원이 그 이유를 묻자 계찰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처음에 내가 마음속으로 이미 보검을 주겠노라고 허락하였거늘, 어찌 그가 죽었다고 하여 내 마음을 배반할 수 있겠는가.(始吾心已許之, 豈以死倍吾心哉)"
여기서 마음으로 허락한다는 의미의 ‘心許(심허)'라는 말이 유래됐다. 심허는 신의를 중히 여겨 말로 약속하지 않았더라도 마음속으로 허락한 일은 꼭 지키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그래서 季札掛劍(계찰괘검, 계찰이 검을 걸어놓다)은 신의(信義)를 중히 여김을 비유한 말이다.
식언이비(食言而肥, 식언으로 살이 찌다)는 계찰괘검과는 정반대의 고사성어이다.
노나라의 애공에게 맹무백이라는 대신이 있었는데 식언(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을 일삼았다. 어느 날 연회에서 맹무백이 몸이 비대한 신하를 놀렸다. “무엇을 먹고 그렇게 살이 쪘소?” 그러자 애공이 대신 대답했다. “말을 하도 많이 먹었으니 살이 안 찔 리 있겠소?” 식언이 잦은 맹무백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애공이 이를 비꼰 것이다.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고사다.
말로 한 약속도 지키지 않는 식언이비의 시대에 하물며 행동에서 비춰지는 그 사람의 마음으로 한 약속도 지켜야 한다는 계찰괘검의 교훈은 전혀 의미가 없을까.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행동과 마음으로 표시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분노하고 소송까지 제기하는 걸까?
자신은 계찰괘검을 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는 계찰괘검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오늘도 내 마음과 내 행동은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헛된 약속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