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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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가 사랑하는 여인이 생겼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녀를 소개하고 자랑했다. 그녀와 같이 있지 않을 때도 K는 그녀 이야기를 했는데 그녀가 바라는 것이 무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그 내용을 물어보며 자기 힘으로 도와줄 수 있는 바를 찾으려 노력했다.

그러다 둘 사이가 틀어졌다. 더 이상 K는 그녀를 만나지 않는다. 아니 이제는 증오했다. 술을 먹고 친구들에게 하소연한다. 때로는 저주까지 한다. 그동안 자기가 얼마나 그녀를 위해 노력했는지 말하면서 정말 뜨거운 맛을 보여주고 싶다고 분노한다.

영문학을 전공한 어느 교수님 책에서 논어의 한 구절이 인용된 것을 보았다.

愛之欲其生(애지욕기생)
사랑할 때는 그 사람이 살기를 바란다.

사랑의 진정한 의미는 그 사람을 얽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기 뜻을 펼치고 살아가도록 바라는 큰마음을 갖는 것이라는 취지의 해설이 붙어 있었다. 그 사람이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사랑이라... 꽤나 함축적이면서도 멋진 말이라는 인상을 받았었다.

그러다 뒤늦게 논어를 제대로 읽어보면서 위 문장의 함의(含意)가 조금은 다르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위 문장은 논어 제12 안연(顏淵)편에 나오는 문장인데 해당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사진=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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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張 問崇德 · 辨惑,(자장 문숭덕·변혹)
子曰 "主忠信, 徙義, 崇德也. 愛之欲其生, 惡之欲其死, 旣欲其生又欲其死, 是惑也." 
(자왈: "주충신, 사의, 숭덕야. 애지욕기생, 오지욕기사, 기욕기생우욕기사, 시혹야.)

자장이 덕을 높이는 일과 미혹을 분별하는 일에 관해 묻자 공자가 말했다. “충과 신을 주로 함으로써 의로움을 실천하는 것이 덕을 높이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그를 살리고 싶어 하고 누군가를 미워할 때에는 그가 죽기를 바라니 이미 누군가를 살리려 하고 또 죽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혹(惑·미혹)이다.”

공자는 ‘미혹됨이 무엇입니까?’라는 제자 자장의 질문에 답하면서 ‘사랑할 때의 마음과 미워할 때의 마음이 완전 뒤바뀌는 그 자체’를 두고 미혹함이라 답했다. 이에 대한 송나라 유학자 주희(朱熹)의 해석은 이러하다.

“사랑과 미움은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갖는 것(人之常情)이다, 그러나 사람의 생과 사는 천명(天命)에 달려 있어서 바란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한다고 죽은 것을 살리고 싶어 하고 미워한다고 살아있는 것이 죽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혹(惑)이다.”

즉, 사람을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愛惡·애오)는 인간에게 속하는 반면 삶과 죽음은 인간 너머에 있는데 그것을 혼동하니 그것을 두고 미혹된 것이라 했다. 따라서 미혹되지 말고(불혹·不惑) 사리분별력을 갖춰야 한다는 의미다.

이렇듯 원래 논어에 나오는 ‘애지욕기생’은 사랑의 정의(定義)를 멋있게 표현한 말이 아니라 인간이 타인을 파악하는 과정에서의 미혹됨을 경계하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논어에서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지인(知人), 즉 ‘사람을 어떻게 알아보느냐(파악하느냐)’이다. 논어 곳곳에는 사람을 파악하는 법에 대해 공자의 의견이 소개되어 있으며 지극히 2분법적이지만 군자와 소인을 대별하여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을 미워한다. 왜 그럴까? 그 사람이 달라져서일까, 아니면 내가 그 사람을 처음부터 잘못 파악해서였을까? 물론 사람이 변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히려 내가 그 사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뒤늦게 실체를 깨닫고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고는 말한다. “그 사람이 날 속였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 사람이 날 속인 것이 아니라 내가 날 속였던 것이다. 그 사람을 좋아해서 그 사람의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내가 만든 허상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사진=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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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만날 때 그 사람의 실제 모습을 샅샅이 파악한 뒤에라야 좋아해야 한다면 우리 모두 최첨단 수사기법으로 무장된 CSI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그건 아니다. 살아가면서 자기만의 허상에 빠져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해 보지 않은 사람에게 무슨 매력이 있을까. 다만 논어의 위 문장은 이렇게 읽어야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은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파악하는가에 달린 문제다. 나로서 비롯된 것이지 그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가 살기를 바라다가 마음이 바뀌어 그 사람을 미워하고 잘못되기를 바라는 것. 공자는 그러한 마음의 불안한 널뛰기를 미혹(迷惑)이라 했던 것이다.”

우리는 공자가 당신 나이 40에 불혹(不惑), 즉 미혹되지 않았다고 말했음을 안다(논어 위정편). 여기서의 불혹은 사람을 파악함에 있어 내가 만든 허상을 바탕으로 무턱대로 사랑하거나 미워하지 않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누군가를 위한 내 마음의 상태가 애지욕기생일 수도 있고 오지욕기사(惡之欲其死)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같은 사람을 두고 두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면 그리고 그것 때문에 내가 힘들어 미칠 지경이라면 오히려 문제는 나 자신에게, 내가 사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에 있다. 공자는 그런 우리 어깨를 툭 치며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스스로 미혹에 빠졌음을 인정하고 그 마음을 찬찬히 접기 위해 노력하시길. 힘들겠지만. 그렇게 한다면 능히 군자가 아니겠소이까. 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