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꼬여버렸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지? 아무리 생각해도 꼬인 지점을 명확하게 찾기가 쉽지 않다.
부부 관계도, 인간관계도, 회사 경영도 모두 마찬가지다. 언제부터 꼬이고 어려워지기 시작했는지 답을 찾으려면 무척이나 어렵다. 여러 가지 요인들이 섞여 있고 사람의 기억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일이 꼬인 원인을 찾는 것은 수많은 실타래가 얽혀버린 것을 푸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이다. 사실 이유는 무수히 많다. 한 회사가 부도가 났다 하자. 부도가 난 사실은 명확하지만 사건이 터질 때까지는 수많은 요인들이 작용한다. 세계경제의 변화, 새로운 경쟁 제품의 출현, 내수경제 침체 등 외부요인에서부터 여러 가지 내부 요인까지, 원인을 찾아가다 보면 굉장히 복잡하고 다양하다.
게다가 하나의 원인을 보아도 그것은 수많은 이전의 원인과 결과가 여러 번 합쳐진 복합적인 원인이다. 한강 하류에 물이 마르는 이유는 한강 상류에 물이 부족해지는 것이고 이에 대한 원인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지구 온난화라는 자연현상과 갖가지 인재까지 합쳐지는 복합적인 원인인 것이다.
모든 시작은 미미한 듯 보인다. 그런데 그 미미한 시작 이전에도 끝 지점에는 큰 바다가 있고, 이 바다에 이르러서야 다시 태양으로 인한 증발이 시작되어 구름이 되는 순환의 이치가 있다. 많은 종교와 사상가들이 시작이 끝이기도 하고 끝이 시작이기도 하다고 표현하는 지점이다.
또한 이 시작부터 살펴보면 인생에서도 하나의 큰 줄기에 연결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줄기 또한 시작부터 무수한 인연들과 노력이 합쳐진 결과이다. 이것들이 다 연결되어 인생의 흐름을 만든다.
불교에서는 有(유)라는 때가 있는가 하면 始(시)라 하여 시작하는 때가 있고, 그 이전에 無始(무시)라는 때가 있고, 그 이전은 無無始(무무시)라는 때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게 참 황당한 이야기 같지만 실은 시작은 여러 가지 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 사건을 해석하기 위해 시작을 무엇으로 잡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생겨나게 된다. 그런데 사건의 흐름은 ‘From where to where’이다. 어떤 특정 사건의 시작을 무엇으로 잡는가에 따라 그 사건의 앞의 흐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역사의 경우라면 그 기준점을 잡아 사관을 정리한다. 영웅사관이냐 민중사관이냐 관점에 따른 대표성을 정립하는 것이다.
시작과 끝에 관한 논쟁은 본말에 관한 것이다. 철학적이고 근본적인 것이다. 많은 시작과 많은 종말이 가능하다. 그런데 세상살이에서 굴곡 없이 행복하게 살려면 꼭 이 모든 시작과 끝을 명확히 볼 이유도,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가 어우러져 흐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슨 일을 시작하면서 끝이 당장 안 보인다고 징징거리고 초초할 이유도 없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
원래 앞의 앞에 있는 먼 원인은 뿌연 안개처럼 잘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많은 시간을 들여 사색하고 분석하다 보면 보이게 된다. 이것을 ‘도가 텄다’라고 한다. 어떤 분야에서 도사가 되어 원인을 파악할 수 있으면 이것이 어디로 가겠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알고 보면 다 우연 같지만 사실은 필연임을 아는 것이다.
세상의 이치는 간단하다. 물이 넘치면 비우고, 비어 있으면 채우면 된다. 비어 있으면 채우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욕망이고, 넘치는 경우라면 비우면 된다. 그런데 인간은 욕심 때문에 스스로 비울 수가 없다. 물이 찬 상태에서도 더 채우려고만 한다. 그럴 때 희한하게도 비우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쳐도 때가 되면 세상이 깨끗하게 비워준다. 배가 고플 정도로. 그럼 이때부터 남은 길은 다시 채우는 것뿐이다.
지금 하는 일의 앞이 안 보인다고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다. 보이지 않더라도 다 앞으로 흘러가고 있다. 단 비웠던 잔의 물이 채워 넘치기 직전까지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이미 잔이 채워졌다면? 큰 욕심 부리지 말고 유지하는 것이 최상의 전략이다.
또한 이 시작부터 살펴보면 인생에서도 하나의 큰 줄기에 연결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줄기 또한 시작부터 무수한 인연들과 노력이 합쳐진 결과이다. 이것들이 다 연결되어 인생의 흐름을 만든다.
불교에서는 有(유)라는 때가 있는가 하면 始(시)라 하여 시작하는 때가 있고, 그 이전에 無始(무시)라는 때가 있고, 그 이전은 無無始(무무시)라는 때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게 참 황당한 이야기 같지만 실은 시작은 여러 가지 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 사건을 해석하기 위해 시작을 무엇으로 잡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생겨나게 된다. 그런데 사건의 흐름은 ‘From where to where’이다. 어떤 특정 사건의 시작을 무엇으로 잡는가에 따라 그 사건의 앞의 흐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역사의 경우라면 그 기준점을 잡아 사관을 정리한다. 영웅사관이냐 민중사관이냐 관점에 따른 대표성을 정립하는 것이다.
시작과 끝에 관한 논쟁은 본말에 관한 것이다. 철학적이고 근본적인 것이다. 많은 시작과 많은 종말이 가능하다. 그런데 세상살이에서 굴곡 없이 행복하게 살려면 꼭 이 모든 시작과 끝을 명확히 볼 이유도,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가 어우러져 흐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슨 일을 시작하면서 끝이 당장 안 보인다고 징징거리고 초초할 이유도 없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
원래 앞의 앞에 있는 먼 원인은 뿌연 안개처럼 잘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많은 시간을 들여 사색하고 분석하다 보면 보이게 된다. 이것을 ‘도가 텄다’라고 한다. 어떤 분야에서 도사가 되어 원인을 파악할 수 있으면 이것이 어디로 가겠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알고 보면 다 우연 같지만 사실은 필연임을 아는 것이다.
보통 우리가 세상을 살 때 앞일을 예측하면서 큰 탈 없이 가려면 일의 한 두 단계 전과 한 단계 앞만 잘 이해해도 된다. 한강 하류에 물이 말랐다면, 한강 상류에 물이 있느냐, 없느냐만 알면 된다. 강원도 내륙에 비가 얼마만큼 내렸는지, 산의 계곡에 물이 말랐는지, 바다에서 구름이 몰려와서 산 위에 비가 왔는지, 이걸 다 알 필요가 없다. 그냥 한강 상류에 비가 내리느냐, 아님 한강 상류에 물이 있느냐를 보고 판단하면 된다. 여기서 물이 한강 하류까지 오는데 걸리는 시간, 그 시간의 문제만을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어차피 모든 일은 원인과 결과가 합쳐지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돌격이나, 후퇴라는 것이 꼭 어떤 방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전쟁에서 말하는 ‘배수의 진’도 결국 죽을 각오로 ‘앞으로 후퇴하라’는 뜻이다. 모든 일은 다 앞으로 가기 위해서 흐르는 것이다. 그냥 상황에 맞추어 가면 된다. 가는데 바위가 하나 있으면 옆으로 가면 된다. 이것이 사물이 발전하는 모습이다. 또한 사람의 세상살이 행로이기도 하다
돌격이나, 후퇴라는 것이 꼭 어떤 방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전쟁에서 말하는 ‘배수의 진’도 결국 죽을 각오로 ‘앞으로 후퇴하라’는 뜻이다. 모든 일은 다 앞으로 가기 위해서 흐르는 것이다. 그냥 상황에 맞추어 가면 된다. 가는데 바위가 하나 있으면 옆으로 가면 된다. 이것이 사물이 발전하는 모습이다. 또한 사람의 세상살이 행로이기도 하다
세상의 이치는 간단하다. 물이 넘치면 비우고, 비어 있으면 채우면 된다. 비어 있으면 채우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욕망이고, 넘치는 경우라면 비우면 된다. 그런데 인간은 욕심 때문에 스스로 비울 수가 없다. 물이 찬 상태에서도 더 채우려고만 한다. 그럴 때 희한하게도 비우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쳐도 때가 되면 세상이 깨끗하게 비워준다. 배가 고플 정도로. 그럼 이때부터 남은 길은 다시 채우는 것뿐이다.
지금 하는 일의 앞이 안 보인다고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다. 보이지 않더라도 다 앞으로 흘러가고 있다. 단 비웠던 잔의 물이 채워 넘치기 직전까지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이미 잔이 채워졌다면? 큰 욕심 부리지 말고 유지하는 것이 최상의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