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의 사기극이냐, 기발한 혁신이냐."
베네수엘라의 암호화폐 도입에 앞서 벌어진 논란을 요약하면 이렇다. 사실상 국가부도 상태인 베네수엘라가 암호화폐를 발행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며 절실함에서 비롯된 극적인 실험의 성공 가능성을 기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베네수엘라는 2017년 12월 '페트로'(Petro)라는 이름의 암호화폐를 발행할 계획이라고 밝혔고 2월20일(현지시간)부터 사전판매가 시작된다.
베네수엘라 당국은 암호화폐 사전판매와 관련한 구체적인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다. 다만 터키, 카타르를 비롯한 중동 국가와 유럽, 미국에서 투자 수요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비공개 사전판매엔 주로 기관투자가들이 응할 전망이다.
페트로는 베네수엘라가 보유한 원유, 천연가스, 금, 다이아몬드 등의 자원을 기반으로 한 암호화폐다. 이름처럼 가격은 이 나라에서 생산하는 원유 가격에 고정(peg)된다. 금 1온스의 가격을 35달러로 고정한 금환본위제도, 이른바 브레튼우즈 체제와 다를 바 없는 셈이다.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1페트로가 자국산 원유 1배럴(약 159ℓ)과 똑같다며 60억달러(약 6조4000억원) 규모인 1억페트로를 발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사전판매에서 전체 발행 물량의 38%를 60% 할인된 가격에 팔고, 나머지는 다음 달에 공개시장에 내놓을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비트코인 같은 주류 암호화폐처럼 '채굴'도 허용할 것이라고 한다. 다만 페트로를 채굴하려면 당국에 등록해야 한다.
베네수엘라가 암호화폐를 도입하게 된 건 자국 화폐인 볼리바르화가 사실상 휴짓조각이 된 탓이다. 반미 성향인 마두로 정권의 폭압에 미국과 유럽연합(EU)이 강도 높은 제재를 취하면서 베네수엘라는 생활필수품조차 구할 수 없는 처지로 전락했다. 그 사이 암시장의 볼리바르/달러 환율은 지난해 7월 말 1달러당 1만볼리바르에서 최근 22만5000볼리바르로 뛰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달러 대비 볼리바르 가격이 반 년 새 2250% 추락했다는 말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이 나라의 물가상승률이 1만3000%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베네수엘라의 페트로 실험은 비트코인을 비롯한 암호화폐가 '디플레이션 통화'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기존 통화는 발행량이 늘어나면 가치가 떨어져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기 쉽지만 비트코인 같은 암호화폐는 발행량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수요가 늘면 가치가 오른다. 디플레이션을 자극하는 셈이다. 베네수엘라처럼 초인플레이션으로 고전하는 나라엔 묘약이 될 수 있다.
더욱이 베네수엘라는 미국과 EU의 제재로 국제 금융거래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다. 페트로는 베네수엘라의 국제 금융 거래를 가능하게 하는 우회 수단이 될 수 있다. 미국 경제전문방송 CNBC는 베네수엘라의 페트로 실험이 러시아처럼 미국의 제재를 받고 있는 나라에 본보기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암호화폐 전문가인 막스 카이저는 지난해 12월 베네수엘라가 페트로 도입 방침을 발표하자 트위터에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며 초인플레이션에 맞선 베네수엘라의 행보를 지지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베네수엘라가 페트로를 발행하는 게 희대의 사기극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야당이 장악한 베네수엘라 의회에선 이미 페트로를 불법으로 규정했다고 지적했다. 자원을 담보로 페트로를 발행하는 건 결국 정부가 빚을 내는 것인데 이는 의회의 승인 없이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다. 의회에선 페트로를 발행하는 게 결국 원유를 미리 파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비판도 있다.
가디언은 페트로의 담보 격인 베네수엘라 유전에서 아직 원유가 생산되고 있는 것도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 재무부는 지난달 페트로에 투자하는 건 베네수엘라에 대한 제재를 위반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공영방송 NPR은 암호화폐 커뮤니티에서도 페트로가 탈중앙집권을 강조하는 암호화폐의 취지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