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CES에서 컴퓨터용 반도체, 즉 PC 프로세서는 '화려한 조연'정도였다. 하지만 이 프로세서가 올해 'CES 2021'에선 주역이 됐다.


코로나19로 다시 PC 시장에 불이 붙었기 때문이다. PC 시장은 스마트폰의 등장 이후 출하량이 지속적으로 감소하면서 쇠퇴하는 시장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이런 흐름을 확 바꿨다. 재택근무, 원격수업이 늘어나면서 PC 수요가 급증했다. 게임이 일상화하고, 유튜브 등 영상 플랫폼의 확대로 영상 편집 수요도 늘어났다.


덕분에 시장조사기관 인터내셔널데이터코퍼레이션(IDC)에 따르면 지난해 PC 출하량이 3억2000만대를 넘어섰다. 이는 2019년 대비 13% 늘어난 수치이다. 2014년 이후 6년만의 최대치다.


IDC는 올해 PC 출하량은 더 늘 것으로 전망한다. 2022년부터는 다시 감소 추세에 들어가겠지만, 여전히 매년 3억대 가량의 출하를 전망한다.


라이언 리스 IDC 부사장은 "재택근무와 원격학습의 증가로 PC 수요가 늘어났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며 "코로나19는 수요를 촉진한 것을 넘어 시장 자체를 확대해버렸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프로세서 시장을 주도하는 인텔과 AMD의 행보에 관심이 모아진다. 여전히 두 기업의 매출에서 PC 프로세서가 차지하는 매출 비중은 인텔이 51%, AMD가 45%이다.


두 기업은 CES2021에서 경쟁적으로 신제품 프로세서를 내놨다. 미국 경제지 포춘은 이런 흐름에 대해 "다시 한 번 반도체 전쟁에 불이 붙었다"며 "두 기업의 신제품은 앞으로 수년간 컴퓨터 시장이 갈 길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전통 강자인 인텔은 그렉 브라이언트 부사장이, 추격자인 AMD는 CEO인 리사 수 박사가 연설자로 나섰다. 두 회사가 어떤 제품들을 내놨는지, 그리고 어떤 특징이 있는지를 살펴본다.




◆ 모바일 PC 프로세서


PC 프로세서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모바일 프로세서, 즉 노트북에 탑재되는 CPU 경쟁이다. 재택근무와 원격수업의 확대로 노트북 수요가 크게 늘었다.


특히 실시간으로 이뤄져야 하는 화상회의나 온라인 수업이 늘어나면서 시장이 요구하는 모바일 프로세서 성능 수준이 더욱 높아졌다. 완벽한 비대면 업무환경을 만들기 위해 언제 어디서든 데스크톱 PC 만큼의 퍼포먼스가 필요해졌다.


모바일 프로세서 시장은 여전히 인텔이 최강자이다. 데스크톱 프로세서는 작년 4분기를 기준으로 AMD가 인텔을 역전했지만, 모바일 프로세서는 인텔이 아직 80% 이상 점유하고 있다. 다시 확대되는 시장 속에서 빼앗으려는 AMD와 지키려는 인텔의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



AMD는 CES2021에서 고성능 모바일 프로세서 '라이젠 5000 시리즈'를 내놨다. 지난해 AMD가 공개한 젠(ZEN)3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한다. 개별 코어 성능은 전작보다 23%, 전체 성능은 전작보다 최대 16% 더 빨라졌다. 인텔에 비해서는 최대 39% 높은 성능을 낸다는 설명이다.


리사 수 CEO는 "가정에서 일하고 교육도 집에서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라며 "비대면이란 뉴노멀이 자리잡을 수 있는 배경엔 고성능 컴퓨팅이 있다"고 말했다.


AMD의 추격을 받고 있는 인텔도 11세대 코어H 프로세서를 내놨다. 두께 16밀리미터(mm)이하의 노트북용 프로세서이다. 그래픽카드와의 통신 기능을 강화해 노트북에서도 고성능 그래픽카드를 이용할 수 있게 한 것이 특징이다.


◆ 기업용 PC 프로세서


원격근무 트렌드에 맞춘 기업용 PC 프로세서 시장도 격전지가 될 예정이다. 기업용 PC는 일반 PC보다 보안과 원격 지원, 시스템 관리가 중요하다.


인텔은 모바일 프로세서 이보(EVO)를 기업용으로 강화한 이보V 프로세서를 공개했다.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비할 수 있는 보안 능력이 특징이다. 인공지능 위협 감지 기능을 탑재했다. 기업 관리자가 원격으로 긴급 패치나 보안 소프트웨어를 설치하는 관리 기능도 추가했다.




이와 함께 실시간 영상 재생에 특화한 펜티엄 실버N6000 시리즈와 셀러론 N4500·N5100 시리즈도 내놨다. 교육용 노트북 시장을 겨냥한 프로세서다.


AMD 역시 라이젠 프로 5000 시리즈를 내놨다. 반도체, 운영체제(OS), 프로그램 각 단계별로 보안 기능을 지원한다.


◆ 인텔, AMD VS 애플…전쟁의 시작


AMD와 인텔이 CES에서 모바일 프로세서를 앞세운 이유에는 최근 애플이 독자 개발한 모바일 프로세서 'M1'칩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분석도 있다. 


인텔, AMD 같은 전통 반도체 기업들과 애플, 아마존, 구글과 같은 디바이스 제조사·서비스 기업 사이의 반도체 전쟁이 본격화했다는 신호다.


애플은 작년 11월 독자 개발한 모바일 프로세서 M1을 내놨다. 애플 노트북인 맥북 에어, 맥북 프로에 인텔의 프로세서 대신 M1을 탑재했다. 15년 넘게 이어온 인텔과 애플의 동맹이 깨졌다.


특히 애플은 인텔과 AMD가 모바일 프로세서에 사용하는 기반기술(ISA)인 x86 기술 대신 ARM의 기반 기술을 이용했다. 전혀 다른 기술로 혁신을 이뤄내면서 x86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진영에 위협이 되고 있다.


리사 수 박사는 기조발표 후 기자간담회에서 애플의 M1칩에 대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모두에서 큰 혁신을 가지고 올 기술"이라며 "PC 시장 전체에 얼마나 많은 혁신이 더 이뤄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반도체"라고 높게 평가했다.



당장 고객이었던 애플이 적으로 돌아선 인텔은 아예 이번 CES에서 새로운 반도체 기술인 '엘더레이크'도 내놓았다. 애플 M1 반도체의 기반이 된 ARM 기술 원리를 차용했다. 애플을 견제하기 위해 내놓은 칩인 셈이다.


포춘은 인텔의 '엘더레이크' 기술에 대해 "확실히 애플의 칩 출시가 기존 업계에 강력한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오히려 인텔이 애플의 전략을 복사해 따라가는 모양이 됐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 이어지는 데이터센터 경쟁


데이터센터, 즉 서버 프로세서를 둔 경쟁은 올해도 치열할 전망이다.



이 시장은 아직 인텔이 압도하고 있다. 인텔의 점유율이 작년 4분기를 기준으로 97.5%이다. AMD의 점유율은 2.5%에 불과하다. 인텔의 아성에 AMD가 도전하는 셈인데, 그래서 신제품도 AMD만 내놨다.


AMD는 이번 CES에서 서버용 프로세서 '밀란'(Milan)을 내놨다. 인텔 대비 세부 정보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인텔의 최상위 제품에 비해 68% 빠르게 작동한다고 주장했다.


올해 하반기부터 마이크로소프트, 오라클 등 주요 클라우드 컴퓨팅 사업체에 납품할 예정이다.


◆ AI 시장으로 눈 돌린 인텔


AMD가 서버 시장에 공을 들였다면 인텔은 자율주행, 로봇 등 인공지능용 기술을 공개했다. 침체기에 있는 인텔에 새로운 먹거리가 될 시장이다.


대표적으로는 자율주행차량이다. 인텔은 2017년 인수한 자율주행 스타트업 모빌아이가 올해부터 시범주행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미국(디트로이트·뉴욕), 일본(도쿄), 중국(상하이), 프랑스(파리) 등 4개국에서 진행하는 자율주행기술은 모빌아이와 인텔의 기술로 개발된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를 기반으로 운행된다. 인간보다 1000배 더 안전하게 운전한다는 기술이다.


로봇청소기 등 생활가전용 인공지능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삼성전자가 CES에서 최초 공개한 로봇청소기 '제트봇 AI'에는 인텔의 AI 솔루션인 '인텔 모비디우스'가 탑재됐다.


비전처리장치(VPU) 기술로 100만장 이상의 이미지를 사전에 학습하고, 장애물과 가전제품, 가구 등을 인식하는 인공지능이다.


테크크런치는 인텔과 삼성전자의 협업에 대해 "인텔이 그간 투자해온 AI 분야에서 새로운 먹거리를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인텔은 몇 년 전부터 △AI 반도체 회사 '하바나랩스' △AI 소프트웨어 회사 '시그옵트' △머신러닝 플랫폼 기업 'Cnvrg.io' △자율주행전문회사 '모빌아이' 등을 인수하며 AI 반도체와 솔루션 개발에 투자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