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해질 땐 아직도 ‘무한도전’을 본다. 종영된 지 5년째, 전성기를 지난 지는 10년이 가까워 오지만 여전히 리모컨이 자꾸 거기에 머문다.
소위 ‘국민예능’으로 오래 군림했던 무한도전의 성공 비결에 대해선 수십 가지 해석이 있겠지만 내 마음이 움직였던 이유는 그들이 ‘어린아이처럼’ 놀았기 때문이다.
다 큰 어른들이 비 내리는 논두렁, 질퍽거리는 진흙탕에서 바지가 벗겨지도록 뛰고 넘어지고 바닷가에서 아이스크림 하나 먹겠다고 모래밭에 구르며 싸우는 모습은 충격적으로 유쾌했다.
아무 쓸모없는 일, 그저 신나기 위해 전력을 다해서 몸을 던지던 어린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그 자유로움이 일깨우는 내 가슴속 동심, 철없는 어른들의 ‘애들 장난’은 그 자체로 결국 예능프로그램의 가장 큰 혁신이 되었다.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놀기는 창조 본능을 일깨우는 중요한 방법이다.
아인슈타인은 "창의력을 자극하려면 어린아이와 같은 놀이 성향을 개발해야 한다"고 했다. 피카소도 "모든 어린이는 예술가다. 문제는 어른이 된 후에도 어떻게 예술가로 남을 수 있냐는 것이다”고 말했다.
어린아이들의 놀이에는 어른들의 행동과는 달리 목적도 동기도 승패도 없다. 호기심과 본능과 직관이 이끄는 장난과 놀이는 자연스런 학습을 통해 창조적인 통찰을 낳는다.
무한도전의 놀이가 낳은 통찰은 아마도 ‘놀이의 틀, 즉 예능 쇼들이 수십년간 애써 만들던 특정 포맷을 아예 깨버리면 새로운 웃음이 탄생한다’가 아니었을까.
아기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접하는 장난감은 모빌이다.
알렉산더 콜더(1898~1976)는 '움직이는 조각' 모빌을 창안해 현대조각의 패러다임을 바꾼 혁명가다. 3차원의 예술이던 조각에 움직임, 즉 시간의 흐름과 리듬속에 위치의 변동이라는 요소를 담음으로써 4차원의 예술을 만든 것이다.
그 결과물 또한 엄숙한 예술보다는 나뭇잎, 곤충, 공룡, 새, 강아지, 치즈 등의 이미지로 자유롭고 유쾌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근엄함을 버린 이 추상 예술품이 오늘날 가장 유명한 장난감으로 자리잡은 이유다.
알렉산더 콜더의 혁신 역시 놀이에서 비롯했다. 미술가 집안에서 자란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만의 작업실을 가졌다. 평생 천진한 유머감각과 장난기어린 태도로 유명한 그를 사람들은 ‘잘 노는 소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의 작업실 역시 나무와 코르크, 양철 캔 등 온갖 잡동사니로 이것 저것을 만들며 노는 ‘놀이방’이었다.
그는 특히 철사를 이용해 수준높은 장난감을 만들어 동네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청년때는 서커스 공연에 매료된 뒤 곡예사 인형과 코끼리, 말, 사자 등을 만들어 직접 움직이며 장난감 서커스단 공연을 펼쳐 유명해졌다. 관객은 친구들과 파리 예술계로 확대됐다.
나날이 정교해지던 서커스 놀이 속에서 그는 공간 속에서 물체가 움직이는 방식을 관찰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동역학의 개념을 미술에 결합시켰다.
32세 때 몬드리안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마침 빛과 바람이 실내로 들어오면서 검정, 빨강, 흰색이 어른거릴 때 콜더는 “몬드리안의 작품들이 바람에 움직인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라는 역사적인 아이디어를 얻었다.
놀이와 장난감에 대해 콜더는 진지했다. 그는 어린 아이들을 위해 장난감을 고안하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의 철사 조각들을 장난감이라고 불렀다. 장난감 서커스 놀이에서도 놀이 이상의 의미를 찾지 않으려 했다. 심지어 모빌에도 ‘예술’이라는 꼬리표가 달리는 것을 거부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는 작업실과 집안에 온갖 잡동사니를 늘어놓으며 놀아 아내의 눈치를 늘 보았다. 그렇게 평생의 놀이는 예술이 되고 놀이방은 혁신의 실험실이 되었다. (한겨레 ‘이주은 칼럼’(2023.4.16), ‘생각의 탄생’ 참조)
진지함과 놀이라는 말을 결합시킨 ‘레고 시리어스 플레이’ 워크샵은 2010년에 개발돼 오늘날은 우리나라 주요 대기업에서도 교육프로그램으로 활발히 활용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의 아이디어와 생각을 레고블록을 쌓아 구체화시켜 표현하도록 하면서 회의에서 의견을 자연스럽게 교환하는 방식이다.
NASA가 우주왕복선 사고 안전대책팀을 조직하며 연구자와 엔지니어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활성화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 유명하다. 놀이에 진지한 레고 재단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 ‘놀이 교수’를 2017년 최초로 채용, 놀이 연구 센터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구글이 근무시간의 20퍼센트, 3M이 15퍼센트를 놀이에 배정하도록 하고 고어텍스(Gore-Tex)로 잘 알려진 고어가 업무 시간의 10퍼센트를 ‘장난 시간(Dabble Time)’으로 운영해 새로운 섬유와 기타줄을 개발하는 등 기업이 놀이를 통해 경영을 혁신하는 사례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아이가 놀이를 할 때는 꿈의 세계에서 소재를 가져와 현실 세계에 배치한다고 한다. 그러면 놀이는 꿈과 현실의 교차점이 된다.
이러한 아이들의 사고방식은 결과나 주위의 인식에 집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상상하고 질문하면서 학습한다. 그 자유로운 몰입의 과정에서 창의력이 생겨난다.
그래서 위대한 예술가들은 자꾸만 동심으로 돌아가려 한다. 건축가 자하 하디드는 “어린 시절 스케치북을 꺼내 그위에 어른으로서의 영감을 그리는”식으로 작품 구상을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어린이의 생각으로, 동심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다는데 있다. 어른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까 싶은 생각이 자꾸만 그걸 가로 막기 때문이다.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는 '천재는 마음대로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 이라며 이 점을 인정했다. 피카소도 “나는 라파엘로처럼 그리는 데는 4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처럼 그리는 데 평생이 걸렸다”고 했다.
천재가 될 수는 없어도 내안의 창조본능을 일깨우려면 아이처럼 세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고 아이처럼 끝없이 질문하고 아이처럼 성과없이 몰입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니 어리석은 질문과 뜬금없는 호기심과 엉뚱한 놀이에 뛰어들어 볼 일이다. 내면의 판관이 “지금 장난해?”라고 물을 때 “응, 나 지금 장난해. 아주 진지하게”라고 용기있게 물리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