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New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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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수강신청을 하던 날. OT에 참여한 한 학번 위의 선배들은 우리 학교에 '꼭 듣고 졸업해야 할 3대 수업'이 있다고 했다. 애석하게도 나머지 2개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하나는 내가 들었기 때문에 기억이 난다. 바로 '연극의 이해'였다.

연극의 이해, 라는 제목의 수업을 진행하던 교수가 마광수였다. <즐거운 사라> <가자, 장미여관으로> 등의 소설을 출간했다는 이유로 구속 수감된 뒤 학교에서마저 파면된 연세대 교수. 전세계적으로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 예술이냐 외설이냐라는 꽤 굵직한 질문을 던졌다. 선배들은 학생들과 시민단체가 그의 석방과 복직을 외친 끝에 마광수 교수가 다시 연세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광수 교수에게는 여전히 국문과 전공 수업이 아닌, 기초교양 수준의 수업만 주어지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그 중 하나가 연극의 이해였다.

무엇보다도 마광수 교수의 수업 과제 - 에로틱 판타지 소설 쓰기 - 가 굉장히 끌렸다. 졸업 전 넘어야만 하는 하나의 퀘스트처럼 느껴졌달까. 그러나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기에 나는 2학년 2학기에 가서야 수강신청에 성공했다.

마광수 소설 '즐거운 사라'
마광수 소설 '즐거운 사라'

첫날부터 잘나가던 시절을 이야기하는 마광수 교수의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생긴 건 그리 빠지지 않는데 머리가 빠져서 여자들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던 그는, 충격적인 일화들로 나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가르치던 여대생과 캠퍼스 내 숲에서 재킷을 깔고 섹스를 즐겼다는 자랑부터 친구라는 중견 가수 J씨의 화려한 여성편력까지. 사람들이 함부로 입밖에 내지 못하는 단어들과 일화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내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신기함 반, 통쾌함 반을 느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광수 교수가 의도한 것도 그것이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욕망이 있는데, 그 욕망이라는 것을 (특히 한국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숨기려고만 하지 제대로 대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욕망의 외면이 계속되면 그 사라지지 않는 욕망이 응축되어 잘못된 방향으로 분출될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는 문학은 그 욕망을 대리배출시켜 작품을 읽는 인간에게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다고 보았다.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고,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수준으로 욕망을 관리할 수 있게 (성폭행이나 심각한 변태성욕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도록) 하는 기능을 한다고 말이다. 내게는 프로이트가 꿈이 무의식에 숨어있는 욕망을 실현시킴으로써 인간이 그 욕망을 실제로 실현하거나 혹은 미쳐버리는 것으로부터 막아준다고 분석한 것과 비슷한 개념으로 들렸다.

의외로 마광수 교수는 변태적인 성욕이나 성행위를 옹호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문학이라는 그 어떤 매체보다 안전한 형태의(텍스트밖에 없으니) 분출을 통해 해소하자는 건전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었다. 

"내 책하고 무라카미 하루키 책하고 놓고 한 번 읽어봐. 누구 책이 더 야한가. 내 책에 19금 딱지를 붙이려면, 하루키 책에도 붙여야지. 그런데 나한테만 그렇게 하잖아." 

그의 말대로 직접 구해서 읽어본 마광수 교수의 장, 단편 소설들은 '야하다'는 느낌 보다는 솔직히 '더럽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더러움이, 굉장히 노골적이고 솔직했다. '나는 이런 인간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런 느낌의 문장들이었달까.

/그림=마광수 작
/그림=마광수 작

연세대에서 소문난 천재였던, 올 A+의 성적에 윤동주를 완벽하게 해체한 논문으로 모든 교수들의 사랑을 받았다던 마광수의 문장은 그렇게 천박함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한 의도가 있는 천박함이었다. 그는 문학을 통해 꽉 막힌 한국 사회에 질문을 던졌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질문('예술이냐 외설이냐')을 모두가 한번쯤은 생각하게 만듦으로써 스스로의 삶을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만들었다. 비록 그의 텍스트들은 문학적이라고 말하기 어려울지라도.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마광수 교수의 나름 '팬'이 된 나는, 내가 활동하던 학보사에서 인터뷰를 추진했다. 수업이 끝나고 인터뷰를 요청하는 내게 그는 졸린 표정이었지만 흔쾌히 알았다고 답했다. '가자 장미여관으로'라는 팻말이 붙어있던 그의 연구실은 역시나 다른 교수들의 연구실과 너무 달라서 또 한번의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책장 하나 없이 사방이 흰 벽이었던 그 방에는 책상과 의자, 그리고 긴 손톱에 새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손 모형이 있었다. 마 교수 책상 옆 벽에는 야한 여성들의 사진이 도배되어 있었다. 그 요상한 풍경 한가운데 앉아 상표가 '장미'인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그는 나를 맞아주었다.

"내 작품은 포르노가 아니다."
수업에서처럼 역시나 억울함을 토로하는 그의 모습을 조심스레 관찰했다.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나서 또 한 대를 집어들며, 줄담배를 피우는 그의 모습에 인터뷰가 끝나고 나는 눈치보다 한 마디를 건넸다. "교수님 담배 조금만 줄이셔요. 학생들이 교수님 이렇게 좋아하는데, 오래오래 건강하셔야죠." 평소 잘 웃지 않는 마광수 교수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기사가 나간 뒤 혹시나 마광수 교수가 마음에 안 들어하는 부분이 있으면 어쩌나 전전긍긍해하고 있을 때, 그의 홈페이지에 내가 쓴 기사 인터넷 링크가 전문과 함께 올라왔다. 그 학기 나는 내 생애 첫 소설(에로틱 판타지)을 제출했고 학기가 끝날 무렵 A+이라는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홍익대 교수 시절의 젊은 마광수/사진=마광수 교수 홈페이지
홍익대 교수 시절의 젊은 마광수/사진=마광수 교수 홈페이지

나처럼 수업을 들었던 한 친구는 빈소를 찾아가 볼 예정이라고 했다. 포르투갈 포르투에서 이 소식을 접한 나는, 그저 그의 영혼을 위해 잠시 기도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나는 그의 선택을 존중한다.

"우리는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죽을 권리라도 있어야 한다. 자살하는 이를 비웃지 말라. 그의 좌절을 비웃지 말라. 참아라 참아라 하지 말라. 이 땅에 태어난 행복,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의무를 말하지 말라. 바람이 부는 것은 바람이 불고 싶기 때문. 우리를 위하여 부는 것은 아니다. 비가 오는 것은 비가 오고 싶기 때문. 우리를 위하여 오는 것은 아니다. 천둥, 벼락이 치는 것은 치고 싶기 때문. 우리를 괴롭히려고 치는 것은 아니다. 바다 속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것은 헤엄치고 싶기 때문. 우리에게 잡아먹히려고,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키려고 헤엄치는 것은 아니다. 자살자를 비웃지 말라. 그의 용기 없음을 비웃지 말라. 그는 가장 솔직한 자. 그는 가장 자비로운 자. 스스로의 생명을 스스로 책임 맡은 자. 가장 비겁하지 않은 자. 가장 양심이 살아 있는 자."
-마광수 <자살자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