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석학들은 세계 경제의 질서는 코로나 전과 후로 나누어질 것이라고 예측한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최근 ‘역사의 새로운 경계 : 코로나 이전과 이후’(Our New Historical Divide : B.C. and A.C)라는 칼럼에서 “코로나 이후 어떤 변화가 닥칠지 예견할 수 없지만, 세계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았던 것과는 무척이나 다른 모습일 것”이라고 말했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도 월스트리트저널 칼럼에서 “바이러스의 대유행이 종식되더라도 세계는 이전과 절대로 같아지지 않을 것”이라며 “자유 질서가 가고 성곽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전 세계 각국이 경제 위기 대응의 사례로 참고하고 있는 1930년대 대공황 시절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뉴딜 정책은 한국의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단순히 댐을 건설하는 인프라 투자가 핵심이 아니다. 경제주체들이 새로운 협약을 맺고 새 판을 짜서, 게임판의 카드를 새롭게(new) 배분(deal)하자는 것이었다. 자원 배분에 대한 국가적 통제, 복지국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모태였다.
미국경제는 이때부터 제1차 오일쇼크가 터진 1973년까지 유례없는 호황을 구가했고, 평범한 노동자들도 부모 세대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한 번영을 누렸다.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고, 미국에 좋은 것은 GM에도 좋다’는 인식이 퍼진 시절이었다. 거대기업은 산별 노조를 파트너로 인정하면서 노동력 조달의 안정성을 보장받고, 동시에 노동자들에게는 고용의 안정성을 보장했고, 정부는 연금과 의료혜택 등 노동복지를 도모했다. 기업의 이해와 전 국민적 이해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로버트 라이시 버클리대 교수는 ‘슈퍼자본주의’에서 이 시대를 이렇게 평가했다. “자본주의는 이상적인 자유시장을 통해 거의 자동으로 번영한다고 믿는 교과서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모습이었다.”
이들이 꼽는 가장 큰 변화는 세계화 시대의 종말, 즉 컨테이너 경제의 종말이다. 규격화된 컨테이너의 도입은 세계를 마치 축척 지도처럼 좁히고 운송비용을 줄이면서 전 지구적인 공급체계를 가능하게 했다. 펭귄에게 바느질을 가르칠 수 있다면 남극에서도 생산할 것이라는 농담도 유행했다. 전 세계 모든 나라가 전 세계 모든 기업의 고객이 되고 종업원이 됐다. 그런데 코로나바이러스가 60년간의 세계화 물결을 멈추게 한다는 것이다. 제러드 베이커 전 월스트리트저널 편집장은 “의료 장비 등 중요한 생산기지를 자기 나라로 옮겨오고 빗장을 걸어 잠그면서 글로벌사회의 협력은 허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세계화 시대의 국가의 역할은 기업의 자유무역과 이동을 지원하는 것이었고, 기업의 역할은 더 싼 곳에서 만들어 시장만 있다면 어디에서든 파는 것이었다. 그런데 세계화가 종말을 고하면 국가와 기업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
뉴욕대 사회학과 에릭 클리넨버그 교수는 최근 폴리티코에 "코로나바이러스는 우리 사회가 스스로 어떤 사회가 되고자 하는지, 어떤 가치를 챙기려 하는지 재정립해서 장기적으로 더 나은 사회가 되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코로나가 가져온 위기는 주주와 기업의 이익만을 챙기는 상황이 지속하지 않으리라는 경종을 울렸다. 자본주의가 가장 어려운 시험대에 오른 상황”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미 미국의 자동차회사들은 인공호흡기를 생산하고 있고 루이비통과 프라다는 손 소독제와 마스크를 만들고 있다. 각국 정부는 엄청난 돈을 풀어 실업과 파산을 막고 있다. 과연 코로나 이후 국가와 기업의 자격은 무엇일까?
뉴욕대 사회학과 에릭 클리넨버그 교수는 최근 폴리티코에 "코로나바이러스는 우리 사회가 스스로 어떤 사회가 되고자 하는지, 어떤 가치를 챙기려 하는지 재정립해서 장기적으로 더 나은 사회가 되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코로나가 가져온 위기는 주주와 기업의 이익만을 챙기는 상황이 지속하지 않으리라는 경종을 울렸다. 자본주의가 가장 어려운 시험대에 오른 상황”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미 미국의 자동차회사들은 인공호흡기를 생산하고 있고 루이비통과 프라다는 손 소독제와 마스크를 만들고 있다. 각국 정부는 엄청난 돈을 풀어 실업과 파산을 막고 있다. 과연 코로나 이후 국가와 기업의 자격은 무엇일까?
현재 전 세계 각국이 경제 위기 대응의 사례로 참고하고 있는 1930년대 대공황 시절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뉴딜 정책은 한국의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단순히 댐을 건설하는 인프라 투자가 핵심이 아니다. 경제주체들이 새로운 협약을 맺고 새 판을 짜서, 게임판의 카드를 새롭게(new) 배분(deal)하자는 것이었다. 자원 배분에 대한 국가적 통제, 복지국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모태였다.
루스벨트는 1932년 취임 직후 금본위제를 포기하고 달러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빈민과 실업자들을 구제하는 정책 이외에 경제사회의 근간을 바꾸는 정책들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대표적인 것이 1933년 6월의 전국산업부흥법. 기업의 과잉생산과 과잉경쟁, 실업을 막기 위해 정부가 산업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내용이었다. 노동시간을 단축해 고용을 늘리고 임금도 인상해 노동자들의 구매력을 높이자는 취지였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인정해줬는데, 이는 노조를 중요한 사회 세력으로 인정하는 미국 역사상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러자 보수 세력은 뉴딜정책이 소련의 계획경제를 받아들인 사회주의적인 조치라며 극렬하게 공격하기도 했다. 이들에겐 거대 정부가 거대노조와 손잡고 기존의 권력 구조를 재편하겠다는 의도로 비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루스벨트는 노조를 단순히 법률적으로 인정하는 차원을 넘어 사회 대타협의 주체로 격상시켰다. 예를 들어 GM이 자동차노조 연맹을 인정하지 않자 루스벨트 주도로 자동차 업계의 공식 파트너로 인정받도록 했다. 이후 루스벨트는 노조에 대한 지원과 함께 사회보장법을 통해 노동자들이 실업급여와 퇴직연금을 받을 권리도 제도화했다.
반면 루스벨트는 부자들에 대해서는 고통의 분담을 요구했다. 1920년대만 해도 소득세 상한선이 24%, 상속세는 20%에 불과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소득세 상한선을 79%까지 올렸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저서에서 “뉴딜정책은 부자들의 소득 상당 부분, 어쩌면 거의 전부를 세금으로 거둬갔다. 상류층이 루스벨트를 배신자라고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2차 대전 이후 뉴딜정책은 더 진보적으로 확장됐다. 1948년 대통령에 당선된 민주당의 트루먼은 모든 집단과 개인이 정부로부터 공정한 분배(fair deal)를 받도록 한다는 취지로 ‘페어딜(Fair Deal)’ 정책을 추진했다. 저소득층을 위한 공공주택을 건설하고 사회보장제도 수혜 대상자를 늘리고 최저임금도 인상했다.
그러자 보수 세력은 뉴딜정책이 소련의 계획경제를 받아들인 사회주의적인 조치라며 극렬하게 공격하기도 했다. 이들에겐 거대 정부가 거대노조와 손잡고 기존의 권력 구조를 재편하겠다는 의도로 비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루스벨트는 노조를 단순히 법률적으로 인정하는 차원을 넘어 사회 대타협의 주체로 격상시켰다. 예를 들어 GM이 자동차노조 연맹을 인정하지 않자 루스벨트 주도로 자동차 업계의 공식 파트너로 인정받도록 했다. 이후 루스벨트는 노조에 대한 지원과 함께 사회보장법을 통해 노동자들이 실업급여와 퇴직연금을 받을 권리도 제도화했다.
반면 루스벨트는 부자들에 대해서는 고통의 분담을 요구했다. 1920년대만 해도 소득세 상한선이 24%, 상속세는 20%에 불과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소득세 상한선을 79%까지 올렸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저서에서 “뉴딜정책은 부자들의 소득 상당 부분, 어쩌면 거의 전부를 세금으로 거둬갔다. 상류층이 루스벨트를 배신자라고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2차 대전 이후 뉴딜정책은 더 진보적으로 확장됐다. 1948년 대통령에 당선된 민주당의 트루먼은 모든 집단과 개인이 정부로부터 공정한 분배(fair deal)를 받도록 한다는 취지로 ‘페어딜(Fair Deal)’ 정책을 추진했다. 저소득층을 위한 공공주택을 건설하고 사회보장제도 수혜 대상자를 늘리고 최저임금도 인상했다.
미국경제는 이때부터 제1차 오일쇼크가 터진 1973년까지 유례없는 호황을 구가했고, 평범한 노동자들도 부모 세대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한 번영을 누렸다.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고, 미국에 좋은 것은 GM에도 좋다’는 인식이 퍼진 시절이었다. 거대기업은 산별 노조를 파트너로 인정하면서 노동력 조달의 안정성을 보장받고, 동시에 노동자들에게는 고용의 안정성을 보장했고, 정부는 연금과 의료혜택 등 노동복지를 도모했다. 기업의 이해와 전 국민적 이해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로버트 라이시 버클리대 교수는 ‘슈퍼자본주의’에서 이 시대를 이렇게 평가했다. “자본주의는 이상적인 자유시장을 통해 거의 자동으로 번영한다고 믿는 교과서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모습이었다.”
물론 기술이 발전하면서 구조적으로 더 적은 노동이 필요하고, 한국처럼 시장이 작아 무역이 아니면 성장하기 어려운 나라들에서는 당시 대공황 시절 뉴딜이 요구했던 국가와 기업의 자격을 똑같이 요구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위기를 거치면서 경제적 양극화는 기하급수적으로 심해질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의 정부와 기업에 대한 정의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터져 나올 것이다. 그러니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였다는 뉴딜에서 힌트를 얻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