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유가가 사상 처음으로 한때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지난 19일(미 동부 기준)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서부텍사스산원유(WTI) 5월 인도분 가격은 전 거래일 대비 300% 폭락한 배럴당 –37.63달러로 거래를 마감했다. 원유 1배럴을 사면 우리 돈으로 4만5000원까지 덤으로 얹어 주겠다는 상황이다. 1983년 원유 선물 거래가 시작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외신에서는 마이너스 유가의 원인을 ‘이중 블랙 스완’(double black swan)으로 설명한다. 블랙 스완이란 예측하기도 어렵고 극단적인 충격을 불러올 수 있는 특수 상황을 뜻한다. 백조는 희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검은 백조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 지금까지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유일한 검은 백조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블랙 스완 ① 코로나로 인한 수요 급감
코로나로 인해 전 세계 원유 소비가 급감했다. 소비량의 절반 이상이 자동차, 항공, 선박 등 운송용으로 쓰이는데 여러 나라에서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한 셧다운(shutdown·이동 제한)을 시행하면서 사람과 물자의 이동에 제동이 걸렸기 때문이다. 소비 활동이 줄어들면서 제품 생산에 쓰는 산업용 원유 수요도 크게 줄었다. 스튜어드 글릭먼 CFRA리서치 애널리스트는 BBC에 “수요 충격이 너무 커 사람들이 예상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고 말했다.
수요를 찾지 못한 원유는 재고로 쌓이고 있다. 특히 WTI 원유는 내륙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중동산 두바이유나 북해산 브렌트유와 달리 바다 위 유조선을 저장고로 사용하기 어려워 저장 장소를 찾기가 더 어렵다. 네덜란드 라보뱅크는 “WTI 원유 인도지인 미 오클라호마 쿠싱 지역의 원유 재고는 수용 능력의 60%인 5,500만 배럴을 넘어섰다”며 “현재 추세대로라면 두 달 안에 한도를 초과 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원래는 원유 트레이더가 만기일 전에 항공사나 정유업체 등 실수요자에 계약을 넘겨야 하는데, 사겠다는 곳이 없으니 트레이더가 원유를 직접 인도받아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심지어 보관 장소를 찾기도 힘들고, 보관 비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고, 얼마나 오래 보관해야 할지조차 모른다. 결국 트레이더들이 5월물 원유를 인수하지 않고 6월 인도분으로 갈아타는 ‘롤오버’(roll-over·월물 교체)를 택하면서 마이너스 유가 사태가 벌어졌다.
블랙 스완 ② 러시아와 사우디의 석유 전쟁
코로나로 인한 수요 절벽만으로도 유가를 흔들기에 충분한데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주도권 쟁탈전까지 겹쳤다. OPEC(석유수출국기구) 회원국들이 감산 합의에 실패하면서 유가가 폭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와 사우디가 피해를 감수하고라도 오래전부터 눈엣가시였던 미국의 셰일 산업 견제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유가 하락세가 깊어지면서 결국 러시아와 사우디가 주도하는 ‘OPEC 플러스‘는 5월부터 두 달 동안 하루 970만 배럴을 감산하기로 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을뿐더러 감산 폭도 크지 않다는 지적이다. 또 회원국이 합의 내용을 이행하지 않아도 실질적으로 제재할 방법이 없다는 점도 위험 요소로 남는다. 다만 유가가 마이너스를 기록하면서 기구 내에서 조기 감산과 추가 대책 등의 얘기가 나오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유가, 주가처럼 예상 깨고 오를까?
유가가 마이너스 충격에서 회복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미국 정부가 제로 금리와 무제한 양적 완화로 증시를 방어했듯 적극적으로 부양책을 실시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사우디 원유 수입 중단과 7,500만 배럴 규모의 전략 비축유 매입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다. 이를 위한 예산이 정식 편성되면 유가를 끌어올릴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WTI 선물 계약의 경우 6월물은 배럴당 21달러, 7월물은 27달러, 8월물이 29달러 등으로 20달러대를 유지하고 있다. 원래 만기가 길수록 가격이 높지만 5월물의 마이너스 유가와는 엄청난 차이다.
하지만 배럴당 20~30달러는 여전히 업계 평균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미국 셰일업체의 손익분기점은 40달러다. 에너지 컨설팅업체인 리스태드 에너지는 WTI 가격이 배럴당 20달러라고 가정할 때 미국의 유전 탐사 및 원유 생산회사 533곳이 2021년 말까지 파산보호를 신청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미 지난달 미 셰일가스 채굴·생산업체인 '화이팅 페트롤리엄'이 업계에서 처음으로 파산보호 신청을 하면서 셰일업체 줄도산 우려가 커진 상황이다. 미 셰일업체의 위기는 전 세계적인 금융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셰일업체들은 지난 2년간의 저유가로 수익성이 악화해 신용등급이 낮은 상황에서도 주요 은행, 연기금, 자산운용사 등의 투자금으로 연명해왔다. 2013년부터 미국 셰일가스 관련 하이일드 채권 발행 규모가 3,200억 달러에 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