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패션의 대명사 '자라'가 패스트패션을 넘어서고 있다. '한 철 입는 저가 패션'에서 '셀럽의 하객룩'으로, '빨리 고르고 나가는 매장'에서 '오래 머물고 싶은 매장'으로 말이다. 한때 경영 위기를 겪기도 했던 자라는 이 덕분에 루이비통 등을 보유한 LVMH와 나이키, 크리스천디올에 이어 세계 4대 패션기업의 반열에 오르고 있다. 자라의 변신 스토리를 소개한다.
1. 자라의 위기
자라는 1년에 두 번 컬렉션을 발표하는 다른 브랜드와 달리 유행하는 스타일을 포착해 즉시 상품을 만들어낸다. 3주 만에 디자인부터 생산, 유통까지 3주 만에 이뤄지기 때문에 언제든지 가장 트렌디한 옷을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
하지만 자라보다 더 빠른 '울트라 패스트 패션' 브랜드가 이 자리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쉬인'은 소셜미디어 트렌드를 기반으로 매일 6,000여 개의 새로운 제품을 내놓는다. 디자인에서 매장에 진열되는 시간도 1주일로 자라보다 훨씬 짧다. 2018년 매출(2조6천억원)이 자라의 10분의 1에 불과했던 쉬인은 2020년 매출이 13조원으로 급성장했다. 반면 자라의 모기업 인디텍스는 2020년 매출이 전년 대비 30% 하락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더욱이 상품 회전율을 높이는 패스트 패션의 운영 방식 때문에 자라에는 환경 오염의 주범이라는 비판도 꼬리표처럼 따랐다. 옷을 쉽게 구매하는 만큼이나 버리기도 쉽기 때문이다.
2. 자라의 반전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인디텍스의 2023년 1분기 매출이 지난해보다 13% 증가한 76억유로(10조9천억원)로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한 것이다. 수익성도 크게 개선되어 총마진율은 1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인 60.5%까지 올랐다. 주가도 2017년 전고점(36.41유로)에 근접했다.
울트라 패스트 패션 브랜드의 추격과 환경 오염 규제 강화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던 자라가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고 명품 브랜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패션 왕국으로 다시 설 수 있게 되었을까?
3. 한 철 입는 저가 패션 → 셀럽의 하객룩
자라는 원래 유행에 맞춰 한 철만 입고 버리는 옷이었다. 그래서 고급스러운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다. 하지만 최근 자라에 대한 이미지는 완전히 바뀌었다. 패션 마니아들의 시선이 쏠리는 유명 인사들의 결혼식 하객 패션에 자라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2022년 할리우드 스타 셀레나 고메즈는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결혼식에 자라의 파란색 정장을 입고 등장했고 2023년 6월 스페인 대형 은행 산탄데르의 아나 보틴 회장 조카 리카르도 보틴이 결혼했는데, 이 자리에 초대된 여러 하객이 자라의 패션을 선보였다.
"과거 스페인에서 자라는 결혼식에서 절대 입을 수 없는 브랜드였지만 이제는 모든 인플루언서와 셀러브리티들이 자라를 입는다. 인디텍스는 자라도 패션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패트리샤 시푸엔데스 애널리스트, 2023.06.07, 파이낸셜타임스)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지난해 새롭게 회장을 맡은 창업주의 딸 마르타 오르테가가 있다. 일회용 패션이라는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프리미엄 전략을 채택했다. 대표적으로 프리미엄 라인 '스튜디오 컬렉션'이다. 기존의 패스트패션 방식을 깨고 1년에 두 번 컬렉션을 발표한다. 고급스러운 소재와 완성도 높은 디자인으로 품질을 높였고 미국 사진작가 스티븐 마이젤, 프랑스 아트 디렉터 파비앙 바론, 미국 스타일리스트 칼 템플러 등 유명 패션 관계자들을 섭외해 마치 예술 작품 같은 화보 사진과 영상도 제작했다.
국내 패션 브랜드 아더에러와 협업한 컬렉션을 발표할 때는 서울과 파리에서 패션과 기술을 접목한 뉴미디어 아트 팝업 전시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명품 브랜드의 컬렉션을 빠르게 베끼는 브랜드로 인식됐던 자라가 직접 컬렉션을 발표해 유행을 선도하는 브랜드로 변신한 것이다.
4. 빨리 고르고 나가라는 매장 → 오래 머물고 싶은 매장
과거 자라 매장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옷 중에서 나에게 어울리는 보물을 찾아야 했다. 비좁은 탈의실에서 힘들게 옷을 입어 보고 긴 줄에 서서 결제를 기다렸다. 북적대고 어수선한 매장은 저가 이미지를 굳히는 주요 원인이었다. 그래서 자라는 오프라인 매장의 고객 경험을 확 바꾸었다.
① 넓고 쾌적해진 매장
매출이 나오지 않는 작은 매장은 과감하게 폐쇄하는 대신 잘 되는 주요 도시 매장의 규모를 1.5배 늘렸다. 옷과 액세서리가 복잡하게 섞여 있던 과거와 달리 신발, 가방만 따로 진열된 큐레이션 공간 '슈즈&백 존'을 신설했다. 탈의실도 오래 머물며 편하게 옷을 입어볼 수 있도록 크기를 키웠다.
② 체험형 매장
서울 송파구 잠실 롯데월드몰에 있는 자라 매장은 2022년 서울 최대 규모의 체험형 매장으로 리뉴얼됐다. 1층 뷰티 존에서는 AR필터가 장착된 디지털 스크린을 통해 3D 시뮬레이션으로 메이크업을 테스트해볼 수 있게 했고, 피팅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인증샷을 남길 수 있도록 6주에 한 번씩 새로운 테마로 바뀌는 '스페셜 피팅룸'도 마련했다. 2층 아동복 코너에는 체험형 게임을 즐길 수 있는 '디지털 플레이그라운드'도 신설했다.
③ 빨라진 매장
신발, 가방만 구매를 원하는 고객 전용 계산대, 환불이나 제품 문의, 온라인 주문 픽업 고객을 위한 문의 데스크도 따로 만들었다. 모두 한 줄에 뒤섞여서 하염없이 기다리던 것을 개선한 것이다. 고객들이 직접 결제를 할 수 있도록 셀프 계산대도 비치해 기다리는 시간을 더욱 줄였다.
자라의 매출 성장은 매장에 방문하는 고객이 늘어난 덕분이다. 고객 방문 빈도가 높을수록 제품 판매율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2023년 자라 전체 매장의 평균 매출은 2019년에 비해 30% 늘어났다. 오래 머무르고 싶은 고급스러운 매장이 되면서 고객들의 발길을 붙잡았다는 분석이다. 인디텍스에 따르면 같은 지역에 위치한 자라의 일반 매장과 리뉴얼 매장을 비교하면 리뉴얼 매장의 일일 방문객이 10% 더 많다
5. 환경 오염의 주범 → 지속가능한 패스트 패션
자라는 패스트 패션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받는 환경 오염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헌옷 수거, 중고 거래 등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2016년부터 매장에 의류 기부함을 설치했는데 2022년 전 세계에서 1만7천톤의 헌 옷을 수집해 재사용에 활용하고 있다. 또 2022년 11월에는 일부 국가에서 자라 옷을 재판매할 수 있는 중고거래 사이트도 개설했다. 고객들이 가지고 있던 자라 의류를 되팔거나 기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수선을 맡길 수도 있다.
친환경 소재, 탄소중립 섬유를 개발하기 위해 스타트업 투자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스타트업들이다.
① 미국 스타트업 '란자테크' : 탄소 포집 기술로 모은 탄소를 재활용해 폴리에스터 원단을 생산한다. 2022년 출시한 '지속가능 패션' 한정판 컬렉션에 이 회사 원단이 사용됐다.
② 미국 스타트업 '서크' : 버려진 의류를 분해해 원료 상태로 되돌리는 섬유 순환과 재활용에 특화된 회사다. 2023년 4월 서크의 재활용 섬유로 만든 컬렉션을 출시했다.
③ 핀란드 스타트업 '인피니티드파이버' : 개발한 섬유 폐기물과 재활용 천연 섬유로 만든 원단 '인피나'를 개발했다. 2024년부터 인피나를 활용한 의류를 생산할 예정이다.
아시아에 집중되어 있던 생산 공장도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 등 유럽 인근으로 분산했다. 세계 각 매장으로 제품이 이동될 때 늘어나는 탄소 발자국을 줄이기 위해서다. 잔여 재고를 2% 미만으로 운영하는 것도 생산 과정에서의 탄소 발생을 줄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이를 통해 인디텍스는 2025년까지 제품 생산 과정에서 물 소비를 25% 줄이고, 2040년까지 탄소 배출량 제로(0)를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정리하면 자라는 소장 가치가 없는 저가 의류라는 지적에는 결혼식 하객 패션으로도 손색없는 고급 의류를 내놓았고, 붐비고 번잡한 매장이라는 불만에 명품 매장 못지않은 고객 경험을 할 수 있는 매장을 선보였다. 재사용, 친환경 소재 사용으로 환경 파괴적이라는 오명도 벗어나고 있다. 비판을 수용하고 유연하게 변화하며 브랜드 이미지를 바꾸어 반등에 성공한 것이다.
"우리는 빠르기를 원하지 않는다. 대신 민첩하고 유연해지고 싶다. 우리는 거대해지고 싶지 않다. 대신 사람들의 삶에 유의미해지고 싶다. 우리의 목표는 자라를 포함한 인디텍스가 패션 산업에서 변화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마르타 오르테가 인디텍스 회장, 2023.03.30., 로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