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18세의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반 클라이번 콩쿠르 60년 역사상 역대 최연소로 우승했다. 몇 주 뒤 수학자 허준이 교수는 '수학의 노벨상' 필즈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했다.


임윤찬은 리스트의 '순례의 해' 연작 중 '단테 소나타'를 잘 이해하기 위해 "단테의 신곡을 외우다시피 읽었다"고 했고, 허준이 교수는 어릴 적 시인을 꿈꾸다 수학자로 돌아섰다고 했다.


임윤찬의 언급 덕분에 단테의 신곡은 지난해보다 세 배 이상 팔려나갔다. 허준이 교수는 특정 시집을 꼽지는 않았지만, 국제수학연맹(IMU) 유튜브의 필즈상 수상자 인터뷰 영상에서 그가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고운 글씨로 필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시인을 꿈꿨다"는 그는 "수학이 그걸 해내는 또 다른 방법이란 걸 마침내 알게 됐다"며 시와 수학의 연결지점을 설명했다.


등장하자마자 세계 음악계를 깜짝 놀라게한 혁신적인 연주자와 수십 년간의 난제를 해결한 수학자가 '시'문학을 언급한다. 그것은 단지 천재들의 이채로운 취미라거나 연주의 배경지식을 얻는 도구라는 점 이상이다. 작품을 통해서 작가에 감정이입을 하고 그것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연주로 재창조해내는 길, 그리고 자연 속에 존재하는 질서와 패턴 혹은 법칙을 발견해내어 아름다운 형식으로 표현해내는 수학에 이르는 길을 시가 밝혀주었다는 것이다. 창조와 혁신에 문학이 가지는 힘이라 할 수 있다.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교수/사진=과학기술정보통신부



독서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종종 "나는 소설은 읽지 않아"라고 당당히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소설은'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소설 따위는'이라는 보이지 않는 뜻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시는 더 읽지 않는 게 분명하다. 시집의 판매량은 소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처참하니. 그런데 창의성과 창조적 사고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대에 시와 소설을 읽지 않는다? 과연 지식과 정보를 위한 독서만으로 창조 본능을 키울 수 있을까.


상상력은 문학의 기본이며 창조성의 출발점이다. 존재하지 않는 세상 속에 자신을 대입해 볼 수 있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인공지능의 세상을 상상한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클라크의 소설들 속에서 우리는 미래를 예견하거나 세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힘을 얻는다.


임윤찬은 올해 5월 뉴욕 필하모닉 협연 데뷔를 앞두고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의 음울한 첫 음을 준비하면서 '죽음의 천사' 또는 은폐된 인물들이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르는 모습을 상상한다고 했다. 상상의 힘이 이끌어낸 그의 연주는 뉴욕타임스로부터 "글자 그대로 '꿈같은' 연주였다"는 극찬을 이끌어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 /사진=반 클라이번 트위터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창의력 혹은 창조적 사고방식이란 결국 문제 해결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겨났을 때 이를 해결할 수 방법을 찾아내는 통찰력이 곧 창의력이기 때문이다. 한 발 더 나가 조직에서 더 필요한 창조성은 문제를 발굴하는 능력 즉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를 스스로 찾아내서 해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고객의 문제를 '창조'하고 이를 해결해 주는 게 바로 창조적 경영이다.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은 유추(analogy)다. 눈앞의 상황을 전혀 다른 새로운 상황과 연결해 생각하는 능력 말이다. 새의 날갯짓을 보며 비행기의 원리를 떠올렸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땅으로 떨어지는 사과를 보며 달도 지구로 이끄는 힘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뉴턴처럼 유추는 혁신과 발견의 기본 언어다.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은유(metaphor)'가 바로 유추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저어 오오" 라고 어린 시절 배웠던 은유. 세상의 온갖 사물과 현상 감정을 전혀 다른 것과 연결하는 것. 상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유추일수록 더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탄생시킨다. 은유 역시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거리가 멀수록 더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새로운 상상과 유추를 위해서는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사고 패턴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열린 마음가짐이다. 토론토 대학교 연구진은 단편 소설을 읽은 사람들이 인지적 종결(cognitive closure) 욕구가 더 낮다는 사실을 발견했다.(Harvard Business review 2020.3.6.)


즉 확고 불변한 최종 결론을 얻고자 하는 마음 대신 모호함에 대해 개방적인 마음을 가진다는 뜻이다. 문학은 이분법의 세계가 아니다. 세계 명작을 읽어보면서 '이렇게 비윤리적이고 괴상망측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단 말이야?'라면서 놀란 적이 많을 것이다. 그런 작품을 읽으면서는 자기 생각을 바꿔야 할 수밖에 없다. 문학에는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관점만 있기 때문이다. 정답과 오답, 옳고 그름만 따져서는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창조의 본능이 생겨나긴 힘들다.


결국 문학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작품의 속으로 들어가 공감하고 감정이입을 하는 것이다. 소설을 읽는 가장 큰 효과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간접 체험'하는 것이라고 늘 배웠다. 작품 속에서 펼쳐지는 주인공의 인생에 뛰어들어 그와 같이 느껴보고 생각해보면서 '나라면 어떨까'라고 감정 이입해보는 것 이는 소설과 같은 픽션만이 줄 수 있는 경험이다.


기업에서 고객 만족 혹은 고객 감동을 위해 세밀한 관찰이 필요하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능력이 바로 공감 능력과 감정이입 능력이다. 역지사지 즉 입장바꿔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져야만 그들이 해결을 원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혹은 어떤 새로운 발견을 찾아낼 수 있는지가 보이기 때문이다.


<사이언스>에 게재된 논문 「문학 소설을 읽으면 마음이론Theory of Mind이 향상된다」에 따르면 문학 소설을 읽는 사람은 논픽션이나 대중소설을 읽은 사람보다 공감 능력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마음이론'이란 쉽게 말하자면 '다른 사람의 마음 상태를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실험 결과는 아무것도 읽지 않았을 때/논픽션을 읽었을 때/대중소설을 읽었을 때와 비교해서 문학 소설을 읽었을 때 '마음이론'이 일시적으로 더 향상된다는 것이다.


논문 저자들은 "문학 소설은 음운적, 문법적, 의미적으로 참신한 장치를 써서 독자에게 낯선 경험을 선사한다"며 "예상을 뛰어넘는 형태로 독자의 사고방식에 도전하는 문학 소설의 힘이 작가의 창조력을 독자에게 전달한다"고 설명했다. (독서신문 2019.11.7.)


공감 능력과 감정이입 능력, 유추 능력 그리고 상상력. 창조본능의 기본 근육이라고 할 이런 자질들을 키워주는 시와 소설들을 보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꼭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도 임윤찬의 다음 말 같은 걸 보면 확실히 아름다운 글을 읽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임윤찬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꽉 찬 관객석 앞의 피아노로 걸어 들어가는 초조함을 이렇게 말한다. "무대 문이 열리고 관객들이 박수를 보낼 때, 긴장한 마음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 첫 건반을 누를 때, 그 순간은 저에게 '빅뱅'과도 같습니다." "긴장되지만 우주의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의 이미지가 저에게 용기를 줍니다. 저는 그 순간을 그 작은 점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소설은 아니지만 누구보다 문학적인 글로 대우주의 신비함을 우리에게 일깨웠던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 따온 말이다. 이런 비유, 참 근사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