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경기는 배드민턴의 안세영 선수 단식 결승전이었다. 1세트에서 무릎에서 “뚝” 소리를 들을 정도로 부상을 당해 객석에서 엄마가 “기권하라”고 안타까워하던 상황.
스스로 포기하지 않아도 이기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믿기 힘든 승리를 따냈다. ‘투혼’으로 만들어낸 결과도 대단하지만 경기 후 인터뷰에서 더 신통함을 느꼈다.
“1세트에는 긴장해서 스트로크가 정확하지 않았다. 다치고 난 뒤 마음이 편해지고 몸에 힘이 빠지면서 스트로크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 있었다. 스트로크가 더 정확해지는 걸 느꼈다. 오히려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두르면 망친다는 생각에 2세트는 과감히 포기하자는 전략이었다.”(OBS, 10.9)
지난해 8월 첫승을 거두기 전까지 안세영은 천위페이에게 7연속 패배를 당하며 ‘도저히 이길 수 없나’라는 생각에 시달렸다고 한다. 대비책으로 수비 위주에서 공격을 강화했다. 철저한 전략과 준비 덕분에 첫승을 거둘 땐 “경기 내내 셔틀콕이 훤히 다 보일 정도”로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다. 이후 안 선수는 천위페이에게 연승을 거뒀다.(JTBC 유퀴즈 3.9.)
그러나 이날 급작스런 부상으로 강도 높은 스매싱 위주의 기존 승리전략은 벽에 부딪혔다. 그러자 그는 ‘강함’ 대신 공격과 수비의 ‘정확도’로 전략을 바꿨다. 2세트부터 스매싱의 강도와 수비 범위는 확연히 떨어졌지만 차분한 랠리를 거듭하며 상대의 체력을 소진시키는 전략으로 임했고 3세트에서는 먼저 지쳐버린 상대에게 오히려 압승을 거뒀다.
주목할 점은 ‘예상치 않은 문제적 상황에서 어떻게 창의적인 해결 프로세스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이다. 안세영은 급작스럽게 닥친 혼돈 속에서 1. 포기하지 않았고 2.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적응했으며 3. 새로운 기회를 포착했고 4. 새로운 해결책을 적용했다.
문제적 혼돈의 상황에서 위대한 창조의 업적을 이뤄낸 사례를 또 하나 보자. 몇 년 전 수능 문제에도 출제된 유명한 이야기다.
재즈에 입문이라도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의 1975년 쾰른 오페라 하우스 콘서트이다. 거대한 오페라 하우스에 리허설 몇 시간 전에 도착한 키스 자렛은 피아노가 잘못된 것을 발견했다. 공연용 피아노가 아니라 연습용 피아노가 놓여있었다. 작은 피아노로는 대형 오페라 하우스를 채우는 데 필요한 음량을 낼 수 없었다. 건반도 페달도 부실했다.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이대로는 못한다”며 공연장을 박차고 나왔지만 젊은 기획자의 간절한 설득 끝에 1400명의 관객 앞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그는 피아노의 높은 음역을 피하고 중간 음색에 집중하여 곡에 차분한 느낌을 주었다. 부실한 저음역을 보충하기 위해 왼손으로 반복적인 베이스 리프를 계속 쳐야 했다. 오페라 하우스를 가득 채울 수 있는 볼륨을 만들기 위해 그는 일어서서 건반을 두드렸다.
온갖 문제적 상황을 끌어안고 펼친 그의 즉흥연주는 피아노 독주 앨범을 통틀어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중 하나라는 역사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다.
상황과 장르는 다르지만 두 사례에서 읽어낼 수 있는 교훈은 비슷하다. 예상치 않은 혼란을 맞닥뜨릴 때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쌓아온 능력을 믿으며 제한적이지만 주어진 조건과 도구, 기능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새로운 전략을 통해 위대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혼돈과 혼란, 문제적 상황은 혁신과 창조의 과정에서 늘 나타난다. 스포츠의 승리든 뛰어난 연주든 목표를 설정하고 달려가는 크고 작은 성취를 향한 과정은 매끄럽지 않고 울퉁불퉁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훌륭한 계획과 전략을 질서 정연하게 세워도 우연히 다가오는 혼돈을 피할 수 없다.
중요한 점은 더 매끈한 단계별 전략을 짜는 게 아니라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혼돈과 혼란을 어떻게 껴안을 것인가’다. 결국 창조와 혁신은 예측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해결 능력이란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실험과정에서 발생하는 시행착오에서 어떤 잠재력을 발견하는가에 따라 혁신의 결과가 달려있다.
창조와 혁신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혼돈 즉 실수와 실패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방법으로 전문가들이 제안하는 내용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 무질서함을 끌어안는 오픈 마인드, 정확한 피드백, 협업을 통한 실수의 보강, 정교한 데이터로 과정을 기록하기 그리고 한 발짝 물러서서 큰 그림을 바라보라는 것 등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실수에 대한 열린 마음이 자칫 무능함에 대한 용인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수와 실패의 리스크를 피하려다 보면 조직의 구성원들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보다는 안전하면서도 진부한 과거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픽사의 설립자 애드 캣멀은 <창의성을 지휘하라>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경영자가 자신이 실수와 실패에 기여한 부분을 솔직히 털어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경영자가 실패에서 도망치거나, 실패가 존재하지 않는 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직원들에게 난관에 부딪혔을 때 숨기지 말고 솔직히 공개하라고 강조함으로써 혼돈의 상황에서 공포에 압도당하는 강도를 완화하라는 것이다. 권위적인 우리 문화에서 리더가 실수를 자인하는 것이 얼마나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새겨둘 만한 말이다.
키스 자렛의 사례를 언급한 사람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경제학 콘서트>의 저자 팀 하포드다. 그는 테드 강의 <How frustration can make us more creative>와 저서 <메시(messy)-혼돈에서 탄생하는 극적인 결과>에서 혼돈과 혼란의 우연성을 아예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이유들을 말하면서 또 하나의 뮤지션 사례를 말한다.
바로 U2의 대표 앨범 <조슈아 트리>와 콜드플레이의 슈퍼히트곡 <비바 라 비다(Viva la vida)>가 담긴 4집 앨범을 제작한 세계적 프로듀서 브라이언 이노다.
브라이언 이노는 창작의 벽에 부딪혔을 때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우회전략(Oblique Strategies)’ 카드 세트를 미술가 친구 피터 슈미트와 만들었다.
100장의 카드를 마치 타로 카드 뽑듯 무작위로 뽑으면 그 안에 “전체가 아닌 부분을 보라”, “뼈대를 비틀어라”와 같은 지시사항이 있어서 이걸 어떤 방식으로든 시도해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악기의 역할을 바꿔라”라는 카드가 나와서 연주자들에게 이걸 시켰을 때 필 콜린스는 ‘바보 같은 짓’이라며 엄청나게 화를 내곤 했지만 그의 카드를 활용한 프로듀싱은 데이비드 보위, 이기 팝(Iggy Pop) 등과 함께 록 역사에 남는 앨범들을 만들어 냈다. 1975년에 만들어진 그의 카드세트는 이후 계속 사랑받아 이어져 지금은 아마존에서는 물론 스마트폰 앱으로도 구매할 수 있을 정도다.
핵심은 우연과 의도적인 혼란에 적극적으로 몸과 머리를 던졌을 때 자연스럽게 새로운 발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맹신하는 질서, 자동화, 시스템, 평가, 효율, 패턴에 약간의 혼란과 무질서를 주입하는 것만으로 생각지도 못한 기회와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샘솟을 수 있다”라며 혼돈을 혁신의 원동력으로 적극적으로 껴안으라는 것이 팀 하포드의 주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