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세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는 또 한 번 은퇴를 번복하고 10년 만의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내놓았다. ‘난해하다’는 입소문이 돌았지만 그의 작품중 가장 빠르게 100만명의 관객을 극장에 모았다. 1970년대 말 TV 만화로 시작해 이제는 디즈니에 비견될 정도로 영화사에 남을 거장이 된 그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미지의 세계를 담은 아름다운 그림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수십년간 뒤흔들어 놓았다.
그의 창조와 혁신이 이뤄지는 과정이 궁금했다. NHK 방송사의 4부작 다큐멘터리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한 10년’(2019)과 극장판 다큐멘터리 ‘꿈과 광기의 왕국’(2013) 및 여러 인터뷰 영상들을 뒤져보았다. 함께 나누고 싶은 그의 말들을 여기 되새겨 본다.
1. “창작이란 머릿속에 낚싯대 하나를 늘 던져놓고 있는 거예요” - 창조 세포를 늘 깨워놓기
새로운 시작은 늘 어렵다. 더구나 그는 자신도 보지 못한 존재들을 상상으로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다큐멘터리 속에서 그가 가장 많이 되뇌는 말은 “쉽지 않아”이다. ‘벼랑위의 포뇨’의 구상을 막 시작한 그는 계속 딴짓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작품과 상관없는 그림을 끄적이거나 비디오카메라를 차에 부착하고 길거리를 촬영한다. 몇주가 지나도 아무런 진전이 없다.
기껏 책상 앞에 앉아 작업에 착수하나 싶다가도 금세 그림을 버린다. “오늘은 아무것도 안 된다”며 낮잠 자러 들어간다. 그러다 바그너의 ‘발키리의 행진곡’을 들으며 쉰다. 다음날 갑자기 그림이 잘 그려진다. “아이디어가 어디서 왔어요?”내내 찡그리던 그는 오랜만에 웃는 얼굴로 답한다. “발키리에서 왔지”.
"창작은 머릿속에 낚싯대를 던져놓는 것과 같다"고 그는 말한다. 낚싯대를 던져 놓아도 물고기가 언제 낚일지는 절대 알 수 없다. 그러나 낚싯대를 거둬들인다면 결코 물고기를 낚을 순 없다. 그러니 머릿속에 항상 자신의 목표를 드리워놓고 창조 본능을 일깨워야 한다. 쉴 때도 딴짓할 때도 심지어 잘 때도. 그러다 문득 유레카의 순간이 온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2. “반경 3㎞ 안에서 스토리의 기초를 찾는다” - 관찰의 힘
그가 동네를 돌며 사진을 찍고 비디오를 찍는 것은 단순히 딴짓만을 위해서는 아니다. 그는 “영감은 먼 곳에 있지 않다. 반경 3㎞ 안에서 스토리의 기초를 얻는다”고 말한다. ‘이웃집 토토로’의 핵심 이미지는 동네 버스 정류장에서 환상 한 자락을 더해 아이디어를 얻었다.
‘벼랑위의 포뇨’ 여주인공은 지브리 스튜디오 직원 딸의 사진에서 가져왔다. ‘꿈과 광기의 왕국’ 마지막 부분에는 이층 창문에서 동네를 내려다보며 그가 말하는 장면들이 영화 속 여러 장면과 매치되며 지극히 현실적인 공간에서 상상을 도출해내는 마법같은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동네를 내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하죠. 오른쪽 지붕에서 왼쪽 지붕으로, 또 집들의 배관을 타고 다른 건물로 넘어간다면, 전선 위를 걸을수 있다면, 아주 멀리까지 갈 수 있을 텐데요. 재미없어 보이는 우리 마을도 그렇게 영화로 만들면 참 근사하게 되죠”. (영상)
3. “끝이 안 날 것 같다 시찌프스가 된 것 같아” - 디테일의 힘, 이상주의적 현실주의
누구보다도 상상력으로 가득 찬 비현실을 그리는 그이지만 실제 그림을 그릴 땐 리얼한 묘사에 가장 초점을 둔다. “제대로 된 인간을 그리는 것이 진짜 중요하다. 캐릭터를 그린다고 생각하지 말고 사람을 그린다고 생각하라.” 그는 “사람이 고개를 돌릴 때 눈동자가 먼저 돌아가는지 머리가 먼저 돌아가는지”, “일본 사람들이 인사를 한 뒤에 고개를 바로 세우지 않고 몇초쯤 기울인 상태로 있다가 조심스럽게 세우는지”까지 보라고 애니메이터들에게 요구한다.
그의 창작의 요점은 말하자면 “이상주의적인 현실주의”이다. 가장 이상적인 꿈을 그려 나가되 그 방법은 현실 속의 디테일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디지털 제작을 거부하고 한컷 한컷을 전부 수작업으로 그린다. ‘벼랑위의 포뇨’에서 4초의 군중샷을 만드는데 1년 3개월이 걸렸다. 직원들이 한컷 한컷을 그려오면 그걸 일일이 수정하면서 그는 “끝이 보이지 않아. 시찌프스가 된 느낌이다”고 토로한다. 그런 엄청난 디테일과 리얼함에 대한 집착으로 끝없는 노동을 감수했기에 상상 속의 주인공들이 어떤 이물감도 없이 관객의 마음속으로 직행할 수 있었다.
4. “코에서 피 냄새를 맡을 때까지 고민해야 합니다.” - 고독과 격리의 시간, 자신의 한계와 맞서기
하야오 감독은 자신에게나 동료에게나 절대 관대하지 않다. “자신에게 관대한 사람은 대단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표정은 늘 초조하고 불안하다. 극한으로 자신을 밀어붙인다. 애니메이션 제작을 시작하기까지 3주가 남은 상황에서 미야자키는 바닷가 친구의 집에 머물며 고립을 자처한다.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는 감독에게도 “오늘은 좀 내버려 두어라”며 짜증과 심술을 부려댄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고 싶어요. 영화에 더 몰입할수록 짜증이 더 많이 나요. 영화는 이런 순간에 만들어지잖아요“,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납득이 가는 그림을 그리면 그 스트레스를 풀 수 있죠. 그게 일의 묘미입니다. 무리하지 않고, 자신을 120% 발휘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는 영감을 얻기 위해서는 무의식보다 한차원 더 깊은 내면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벽에 부딪히고 뇌가 지칠 정도로 그렇게 몰두하다 보면 “콧속에서 피냄새가 나요. 그러다가 생각이 팍! 떠오르죠.” 그런데 고민하고 고민해도 영감이 떠오르지가 않는다면? “피냄새를 더 맡아야 한다”가 그의 답변이다.
5. “내 작품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마음으로 해야 해요. 모든 것을 쏟아붓지 못하면 그걸 이룰 수가 없어요. ” - 높은 목표설정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터들은 여간해선 그를 만족시킬 수 없다. 한 직원은 “자아가 강한 사람이라면 같이 일하기 힘들 거다”라고 말한다. 특히 아들 미야자키 고로의 작품을 본 그는 지독하게 말한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으로 영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그저 영화 한 편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론 아무것도 바뀌지 않죠.” 그는 자신에게도 늘 되새긴다.
“내 마음에 진짜라고 믿지 않는 것을 만들었을 때 가장 후회된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하는 게 목표다.” 그의 영화 모두가 세상을 바꾼 것은 아니지만 그는 그런 목표가 있었기에 거기에 한없이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6. “토토로만 봐서는 기초를 다질 수 없어요.” - 책을 읽고 몸을 움직여 지식을 체득할 것.
어떻게 해야 훌륭한 애니메이터가 될 수 있냐는 질문에 “그는 애니메이션만 많이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초가 토토로가 되어선 곤란하다”고 말한다. 그는 여러 인터뷰에서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영역을 넓히고 한계를 극복해야 함을 강조했다.
다큐멘터리에서도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생각하고 영국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며 이미지의 영감을 얻는 그의 모습이 계속 등장한다. 자신의 세계에 틀어박혀 세상과 맞닥뜨리기를 피하는 일본의 ‘오타쿠’들은 그래서 그가 더욱 싫어하는 부류다. 그는 늘 “자신의 몸으로 하는 체험을 늘리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일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만 한다고 해서 잘 되는 게 아닙니다. 애니메이터라면 전국을 돌아다니며 도쿄의 흙빛과 다른 도시가 어떻게 다른지 자기 눈으로 봐야 해요. 그런 것이 캐릭터의 옷에 묻은 흙투성이를 그릴 때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어요”.
7. “영화 만드는 게 가장 재미있어” -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창작을 사랑하기
영화를 만드는 내내 찡그리고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몇 달 내내 담배만 피워대며 “이건 아니야 ”, “안돼”, “너무 길고 험난해”를 반복하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는 입만 열면 ‘기존의 관습을 깨는 이야기와 그림’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고민하며 새로움에 도전한다.
그러나 영화를 끝낸 그는 감격에 겨워 울기도 하고 돌아서서는 히죽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아무것도 안 하면 재미없잖아. 영화 만드는 게 가장 재미있어”.
특히 세상의 변화, 삶의 의미 같은 것에 비관적인 시각을 평생 가지고 있는 그이지만 “관객을 즐겁게만 할 수 있다면 내가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며 자신의 일에 무한한 애정을 보인다. "내가 생각하는 건 모두 없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애들 얼굴을 보면 그런 말을 못 하는 거에요. 그건 중요한 거예요. 날 이 세상에 묶어 놓은 건 어린애들이에요.”
몇 번이나 은퇴를 선언했다가 다시 복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런 사명감과 인간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신의 일에 대한 무한한 사랑 때문인 것 같다. 다큐멘터리 영화의 제목 ‘꿈’과 ‘광기’ 두 단어만큼 그의 창조 본능을 압축한 말도 없는 것 같다. 또 한 번의 은퇴 번복을 기대하기에는 이제 힘겨운 나이이지만 그는 몇 년 뒤에도 아이들 얼굴에 웃음을 짓게 하려고 여전히 상상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궁리를 펼치고 있을 것 같다.